기대와 상상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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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C 주제 구상_ 무한경쟁사회

  대학에 와서 나는 미래에 대해, 진로에 대해, 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은 모호한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떤 경험과 노력이 필요한지 늘 고민했다. 그래서 다양한 교외 활동도 알아보고 대학생 대상 활동 공고도 늘 꼼꼼히 체크하는 등, 꾸준히 ‘성실하고 바람직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한 나에게 요즘 들어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겼다. 내가 내 꿈을 좇는 와중에도 무한 경쟁의식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내 행복과 만족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나 자신에 집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남들은 어떤 활동으로 어떻게 스펙을 쌓는지, 어떤 직업이 바람직하다고 두루두루 인정되는지’ 에 대한 의문과 불안으로 인해 내가 가야할 길을 놓치고 휩쓸려 가고 있음을 때때로 느끼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또 다시 불안을 낳고, 결국 나 자신에 온전히 집중하는 과정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말이다. 이러한 고민이 나라는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일까? 절대 아니다. 오늘 날의 무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이라면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모두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무한 경쟁 사회


우리 사회의 현실

‘경쟁’은 곧 남과의 비교를 통한 자신의 위치 확인과 연결된다. 적당한 경쟁은 동기를 불어넣어 주고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된다. 그러나 지나친 경쟁은 자신의 절대적 가치를 잊게 하고 사람들을 서열화하여 소위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사회’를 만든다. 이러한 문제점은 바로 오늘 날 우리 사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밤잠을 줄이며 공부하는 학생들의 꿈은 ‘내신 1%, 명문대 합격’에 그치고, 한창 원대한 꿈을 꿔야 할 청년들은 ‘주위의 눈, 사회적 지위’ 등의 조건에 얽매여 미래를 꿈꾸기를 두려워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기 고유의 가치관을 상실하게 된다. ‘남들 보기에 좋은 것, 1등이 되기 위한 것’만 추구하다 보면, 정말 중요한 가치들이 무시되고 개인들의 개성이 상실되고 만다.


방안은 무엇인가?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인식, 비뚤어진 믿음을 고쳐야 한다. 꼴등도 1등이 될 수 있다. 이를 사람들이 진심으로 인정하고 자기 자신에 더 집중하게 하려면 교육의 개선이 필요하다.

교육의 개선 아이디어: - 중교고 내신 등급 폐지, 절대평가 장려

                               - 20명 내외로 한 반당 학생 수 줄이기


구도는 이미 깨졌다

신데렐라 언니, 개인의 취향 그리고 남보원에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구도

  현대 한국사회에서의 남녀 권력구조에 대해 ‘불변의 구도’를 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를 옹호한다는 뜻은 아니고, 현 구조에 대한 옹호, 비판과는 별개로 지금의 현실이 언뜻 보기엔 변하는 듯해도 실제로는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분석 내용이다. 물론 이러한 분석에는 타당한 측면이 있다. 몇 천 년을 이어온 남성 중심 사회가 몇 십 년 세월 안에 탈바꿈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변의 구도’, ‘보이지 않는 유리벽’ 같은 부정적인 분석들이 난무한 오늘 날, 오히려 역동적인 사회 변화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기존의 구조를 강화하려는 남성들의 의도가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회 내 변화의 조짐 - 불변의 구도는 깨졌다.


  오늘 날 한국사회에서 ‘알파걸’은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2007년 외무고시 여성 합격자 비율은 67.7%, 2008년 행정고시의 경우 51.2%, 2008년 사법고시 44.3% 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어렵다는 고등 고시에서조차도 여성들은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심지어 공사, 해사 수석 졸업의 영예마저 여자가 차지하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대학 내에서도 여학생들이 남학생들과 동등하게 경쟁하고 우수한 성적을 얻는 것은 흔한 일이며 젊은 세대들은 이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다. 세대가 변하면서 사회는 자연스럽게 좀 더 평등한 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사회에 나아가면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 효과(glass ceiling effect)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유리창 효과란 육아와 직장일 두 가지 모두를 짊어져야 하는 30, 40대 여성이 높은 직책까지 올라가지 못하는 현상을 뜻하는데, 이는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큰 과제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간의 변화를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다소 성급한 판단이라고 하겠다. 100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우리나라 여성의 권리가 이만큼 신장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이다. 그 간에 이뤄낸 결과의 긍정적 측면에 보다 집중하고, 앞으로는 남녀평등을 전제한 미래를 꿈꿔보는 것이 남성 우월주의가 '불변'한 것이라 단정 짓는 것보다는 더 생산적인 논의 전개방향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신데렐라 언니', 은조가 지니는 의미


  일반적으로 미디어는 사회가 지니는 통념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초코크림님도 이 같은 관점에서 '남보원', '개인의 취향', '신데렐라 언니'가 결국 남성 우월적인 한국 사회의 통념을 강화하고 있다는 분석을 이끌어낸다. 대부분 맞는 말이다. '남보원'을 볼 때 마다 웃으면서도 뭔가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고, '개인의 취향'의 개인(손예진 분)은 왜 진호(이민호 분)를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바보같이 굴 수밖에 없었는지 답답했던 것은 아마 그 기저에 깔려있는 남성 중심의 권력구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데렐라 언니' 의 은조(문근영 분)는 그 느낌이 조금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지니는 위상의 변화가 드디어 보수적인 방송 매체에도 조금씩 반영되고 있다는 신호를 은조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초코크림님은 드라마에서 이른바 '알파걸'인 은조에게 한(恨)이라는 모티프를 부여함으로써, 능력이고 진취적인 여성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나 이유가 늘 따라다니는 것으로 표현하고, 그러한 여성을 '예외적'으로 표현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초코크림님의 말대로 은조는 누가 봐도 정말 딱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고, 이 때문에 사람들을 멀리하고 늘 차갑게 대하는 등 불안정한 애착 형태를 보인다. 그나마 은조가 가장 기댈 수 있었던 사람은 그의 양아버지였으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채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사랑하는 기훈(천정명 분)마저 동생 때문에 가까이 하지 못한다. 정말 외롭디 외로운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은조의 한이 사람을 멀리하고 더욱 그녀를 외롭게 만든 이유일 수는 있지만, 그녀가 효모 연구에 집중하고 '대성 참도가'에 열정을 쏟는 이유로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은조가 비정상적으로 일에 열심이고, 그러는 데에는 양아버지에 대한 죄송함, 고마움 같은 마음이 섞여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녀는 힘들고 외로울 때 술독에 기대어 술 익는 소리에 위로를 받았었고, 자연스레 탁주와 도가에 대한 애정을 키워왔다. 이러한 마음이야말로 성인이 된 그녀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열정과 능력의 바탕이 된 것이다. 은조를 '알파걸'로 만든 동력은 그녀 자신이지 다른 어떤 남성(양아버지 혹은 기훈)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드라마 속의 은조를 바라본다면 '남성이라는 권력 구조 속에서의 알파걸 은조'가 아닌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겪은 뒤에도 삶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발견할 줄 아는 한 개인'으로서의 은조를 발견할 수 있다. 

  젠더의 관점이 아니라 지극히 중립적인 관점에서 은조의 성장 배경, 꿈의 동기, 그녀의 능력 등을 다시 살펴보자. 그녀가 참 엄청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드라마에서 이러한 주인공의 역할은 대부분 남자였다. 그러나 이번엔 여자다. '선덕여왕'의 덕만, '신데렐라 언니'의 은조와 같은 여성들이 안방극장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데서 나는 희망을 읽어낸다. 드라마에 있어 주인공의 역경, 그것의 극복, 그리고 해피엔딩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 구조이다. 은조의 이야기 역시 그 구조 안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불변의 남성 우월주의 구조'로 인식하지는 말자. 이제 성공한 여성을 남성과의 관계 내에서 해석해야만 하는 시대는 지났다. 세상에 불변은 없다. 구도는 이미 깨졌다.


알로이시스 수녀를 위한 변론 Part1 (2차 수정)

 

알로이시스 수녀의 플린신부 인지 과정


  영화 다우트(Doubt, 2008)를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엄격하고 자신의 판단을 맹신하는 알로이시스 수녀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된다. 특히 아주 사소한 것들을 근거로 플린 신부라는 사람에 대해 섣불리 판단해 버리는 오만과 끝까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지 않는 고집스러움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의 마음이 불편한 이유가 오로지 그녀의 부당한 행위 그 자체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남을 오판하고 의심하는 알로이시스 수녀 속에서 우리들 자신을 발견하고 이로 인해 괴로워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타인에 대해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주관적인 믿음을 진실로 인식하는 현상은 무수히 많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이미 증명되었다. 결국 우리는 영화를 보며 알로이시스 수녀를 비난하지만, 비난을 당하고 있는 그 모습은 바로 우리들 모두의 일상이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플린 신부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과정은 최신 효과(primacy effect)와 확인 편견(confirmation bias)이라는 심리학적 개념으로 압축해서 설명할 수 있다.
최신효과란 타인에 대해 초반에 지니는 정보가 굉장히 중요하며, 우리가 나중에 획득할 정보에 대한 해석에까지 영향을 미침을 의미한다(Darley & Gross, 1983). 영화 다우트의 전개 순서상 중간 중간에 나타나는 플린 신부의 사소한 습관들은 알로이시스 수녀가 그에 대한 첫 인상을 형성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커피에 설탕을 세 개나 넣고, 볼펜을 쓰며, 성탄 공연에 세속적인 캐롤을 넣을 것을 제안하는 등의 태도는 알로이시스 수녀의 모습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즉, 이러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그녀가 경험에 의해 정립해 놓은 진보적이고, 교만하며, 규범을 우습게 생각하는 인간 유형에 끼워 맞춰 인식된다. 이러한 사실은 알로이시스 수녀가 플린 신부의 습관을 목격 했을 때 드러내놓고 불쾌감과 경멸스러움을 표현하는 데서 읽어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플린 신부에 대한 인상은
확인 편견에 의해 더욱 왜곡된다. 확인 편견이란 상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정보를 찾는 심리적 경향을 가리킨다.(Synder, 1981) 확인 편견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알로이시스 수녀의 내면에서 작용하며, 그녀의 행동에서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신부와 두 수녀가 성탄절 행사를 논의하는 장면에는 확인 편견의 전형적인 모습이 담겨있다. 성탄절 행사에 세속적인 캐롤을 포함시키자고 플린 신부가 제안하자, 제임스 수녀는 ‘꼬마 눈사람’ 이라는 캐롤을 추천하며 즐거워한다. 이어서 플린 신부가 남학생 하나를 뽑아 눈사람으로 분장시키자고 하자, 알로이시스 수녀는 창문 블라인드를 강하게 걷어 올리며, "which boy?"라고 날카롭게 묻는다. 도날드와 신부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확실함을 입증하기 위해 그녀는 언뜻 보기에 그 일과 연관성이 적어보이는 사소한 일에도 그를 몰아세우기로 무의식적 선택을 한 것이다. 이 뿐 아니라 아무런 물증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도날드의 어머니를 학교로 불러내 정보를 캐내려는 모습 역시 확인편견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플린 신부에 대한 강한 불신이 확립된 뒤, 알로이시스 수녀가 플린 그를 몰아내는 과정은
자기 충족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라는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따. 자기 충족 예언은 자신의 잘못된 기대가 상대방을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듦으로써 예언이 현실이 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영화 후반부에서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에게 예전 교구와 연락하여 신부의 과거를 파헤쳤다는 식의 거짓말을 서슴지 않으며 그와 큰 싸움을 벌인다. 이 말을 들은 플린 신부는 크게 당황하면서 무엇을 들었던 지간에 그것은 오해라며 반박하나, 그 격한 말다툼 뒤에 결국 성당을 떠난다. 알로이시스 수녀의 불확실한 예측이 결국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신부가 부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에게 미심쩍은 과거가 있을 수도 있으나, 이러한 비난 자체가 불명예스럽다고 느끼고 떠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도날드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막고자 상황을 종결시키려 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이 어찌된 일이든 간에 수녀는 자신의 예언이 충족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한 역할-거짓말을 하고, 신부를 심하게 몰아세우는 등의-을 인식하지 못한 채 더욱 자신의 판단을 맹신하게 된다.

 
  이렇게 상황이 종결되었더라면, 오히려 알로이시스 수녀의 마음은 더 평온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이 그러한 ‘해피 엔딩’을 어렵게 만든다. 먼저, 고위 당국에서 그녀의 근거 없는 고발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플린 신부를 승진시킨다. 두 번째로 그녀는 수도자이기에, 자신이 거짓말이라는 죄까지 짓게 만든 플린 신부에 대한 의심, 그리고 그 의심에 대한 확신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결국 이 두 계기에 의해 그녀는 영화의 끝부분에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진지한 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영화는 알로이시스 수녀가 제임스 수녀에 기대어 우는 장면으로 마무리 된다.



 참고자료
 -Darley & Gross 의 최신 효과와 확인 편견 실험 내용
보고서
 psychologie.u-strasbg.fr/documentation/SMirabel/Darley_Gross.pdf

 -Synder의 자기 충족 예언 실험 내용
 
http://gatorlog.com/mt/archives/001557.html


알로이시스 수녀를 위한 변론 Part2. (2차수정) 중간고사 프로젝트(다우트)

알로이시스 수녀를 통해 바라보는 보통 사람들의 사회 인지 형태


  
  지금까지 살펴본 영화의 전개과정, 혹은 플린 신부에 대한 알로이시스 수녀의 판단과정은 영화의 상황에만 들어맞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알로이시스 수녀의 행위를 분석하는 데 이용된 최신효과, 확인편견, 자기충족예언과 같은 개념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고 증명된 것들이다. 사람들의 사회 인지 과정에서 이러한 효과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보통 실험을 통해 증명된다. 최신효과의 경우,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에게 한나라는 아이의 행동패턴을 보여주고 그 아이의 학업 성취도를 예측하게 하는 실험을 벌였다. 한 집단(가)에게는 한나가 가난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을, 다른 집단(나)에게는 그녀가 부자집 딸인 것처럼 묘사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 뒤에 한나의 예상 학업 성취도를 물어봤을 때, 그들은 모두 그녀의 성취도가 평균적일 것이라 답했다. 그런데 그 후에 한나가 쉬운 문제에서 엉뚱한 실수를 하기도 하고, 의외로 어려운 문제는 잘 풀어내기도 하는 시험 시간 동영상을 두 집단에게 보여주자, 가 집단은 한나의 학업 성취도가 평균 이하일 것이라 평가한 반면, 나 집단은 평균 이상일 것이라 답했다. 이 실험을 통해 학자들은 타인에 대한 초반의 정보가 즉각적인 영향을 보이지 않아도 후에 그 효과를 드러낸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학자들은 사람들의 사회 인지 과정에서 보편적인 판단 오류가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한 개인일 뿐인 알로이시스 수녀의 판단 패턴을 분석하는 것에서도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음은 결코 허황된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화 다우트에 대한 감상은, 단순히 ‘알로이시스 수녀 너무하다’, ‘누가 진짜로 옳았을까?’ 하는 수준을 넘어 우리의 일상적인 사회 인지 모습에 대한 성찰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영화에서 보이는 판단의 실수는 거의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러한 실수들이 너무 보편적이고 일상적이기에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알로이시스 수녀에 대해 느끼는 혐오스러운 감정, 그것이 사실 우리 자신들에게로 귀속되어야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녀에 대한 반감을 그저 반감에서 그치지 않고, 나 자신에 대한 반감, 나아가 성찰로 이끈다면 우리의 심리가 빚어내는 치명적 오류를 조금씩 줄여나갈 수 있다.






이제는 자존감을 되찾을 때.



  그렇게 큰 논란이 됐던 미수다 루저녀 편을 엊그저께 본 나는 그야말로 뒷북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 일하기에 바빠 관심을 두지 못하다가 결국 과제 때문에 보게 된 이 예능프로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루저녀 사건이 터진지 벌써 일년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때, 비단 루저녀 이도경씨 뿐만이 아닌 여대생 패널, 제작진, 그리고 시청자 모두가 자신의 자존감 회복을 위해 다시 한 번 반성해야 하지 않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

 
 
 
대한민국 여대생 물 먹인 여대생 패널들


  각 학교를 대표해서 나온 여대생들이 하는 말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어떻게 ‘180cm 이하 남자는 루저라는 말만 그렇게 큰 관심을 끈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여대생들의 다른 대답 내용 역시 충격적이다. 그 중 가장 어이없는 것은 더치페이에 대한 최한빛 양의 견해이다. 자기 만한 여자를 만나려면 남자가 모든 데이트 비용을 대는 것쯤은 감수해야 한다는 그녀의 발언은 모든 외국인 여성 패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 뒤에 그녀가 자신의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며, 여자가 남자를 생각해서 꾸미고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만큼, 남자도 그것을 인정하고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고 변명을 시도하나, 그 역시 앞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여자를 만날 때 그럼 남자는 자신을 가꾸지 않는가? 아니다. 남자 역시 애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간과 돈을 들여 옷을 고르고 자신을 가꾸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설사 여자가 남자보다 자기 가꾸기에 더 많은 투자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데이트 비용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결국 남자가 돈을 내야 한다는 최한빛양의 발언은 여성은 아직도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비독립적 존재라는 인식을 전제한 것이다. 그야말로 치욕이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여대생을 대표한답시고 나온 자리에서 그렇게 개념 없이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점은 분명히 사과해야 할 일이다. 그 외에도 많은 패널들이 조건과 사랑에 관련된 주제를 놓고 대한민국 여대생의 이미지에 먹칠을 해댔다. 물론 결혼을 할 때는 누구나 조건을 본다. 그러나 그 조건은 경제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가정 분위기, 성격, 상대의 취미, 취향 등 다양하다. 그런데 패널들은 조건이 마치 능력의 동의어인 냥 사용했다. 이렇게 민감한 문제에 있어 좀 더 명석하게 답변하지 못하고 논란거리를 만들어 내려는 제작진의 의도에 휩쓸려 간 것은 패널들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제작진. 본래 의도는 개나 줘라?

 

미녀들의 수다프로그램의 본래 목적은 세계화 속에서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한국 내 외국인들과의 교류를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회차의 목표는 논란거리만들기에 초점이 맞춰진 듯 하다. 일단 하고많은 주제 중에서, 왜 하필 연애와 미용이었는가? 이러한 소재는 결국 여성 그 자체가 아닌, ‘남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여성이 지니는 의미, 역할 등으로 이야기를 제한시킨다. 방송 뒷부분에서 외국인들이 한국 여대생들에 대해 질문하는 내용들도 거의 전부 여성 비하적인 것들이다. 수업시간에 화장하는 여성, 명품가방만 매는 여성 등, 방송에서 거론되는 여대생의 모습은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한국 여대생들의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다. 대학에 다닌 지 1년이 넘었으나 수업시간에 화장하는 사람을 본 경우는 단 한번도 없고, 주위에도 명품 가방을 매는 친구는 많지 않다. 주제 및 질문의 보편성과는 무관하게 그것들을 한정시킨 뒤 제작진은 내용의 왜곡에 집중한다. 왜곡의 수단으로 가장 빈번히 이용된 것은 자막이다. 일례로, 이도경양이 조건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그녀가 저학년 때에는 아무나 만날 수 있어도 시간이 갈수록 사람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진다라는 말을 한 것에 대해 저학년일 때는 대충 사귀지만이라는 자막이 붙었다. 특히 대충이라는 단어는 빨간 색으로 다른 글자들보다 크게 나와있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녀가 했던 말을 표현하기에는 어감이 너무나 강하고 그 의미 역시 다르다. 제작진이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자막을 달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면서도 그들만의 분명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방송을 분석해가다 보면, 편집의 의도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촬영 중 분명 우리나라 대학생들과 외국인 여성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도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방송된 부분에서 두 집단은 극과 극에 서서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또한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각 물음에 대해서 여대생 쪽에는 부정적인 대답을 한 사람들의 견해만 듣고, 외국인 쪽에서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으로 대답한 사람들의 견해만 듣는다. 예를 들어, ‘조건 VS 사랑의 물음에 대해 사랑 없이도 조건만 맞으면 결혼할 수 있다는 한국 여대생은 3명 뿐이었다. 그런데 답변의 초점은 모두 이 3명에게만 맞춰지고 결혼할 수 없다는 나머지 사람들의 견해는 방송을 타지 않았다. 결국, 제작진은 한국 여성을 아직까지도 보수적이고 의존적인 모습으로 그려나고자 안간 힘을 다한 것이다.

 

방심한 시청자들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패널들과 제작진을 응징할 수 있는 힘은 다름아닌 시청자들에게 있다. 그러나 미수다를 본 시청자들의 초점은 온통 루저라는 단어에만 쏠려 있었다. 작은 것에 집중하느라고 큰 그림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180 cm 가 안 되는 남성들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미수다를 보고도 가만히 있는 여성들은 정말로 반성해야 한다. 대한민국 여대생의 위상이 몇몇 소수에 의해 편협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을 수용하기만 한 사람들 역시 왜곡에 동참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앞으로는 그릇된 것을 본 뒤에는 잘못되었다고 말할 줄 아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일명 미수다 루저녀 사건은 어떻게 보면 개념 없는 패널들로 인해 붉어진 일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매체의 힘을 악용해 여성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강화시키고 논란거리를 만들어내려는 제작진의 의도가 숨어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방송은 절대 생각 없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청자가 긴장을 놓는 순간 제 2, 3의 루저녀 사건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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